기억 전달 포자
Spores that transmit memory2025
구성요소 6점
<기억 전달 포자 - 숲속의 왕다람쥐꼬리> (2025), 메타버스, 가변 크기
<기억 전달 포자 - 왕다람쥐꼬리 이끼> (2025), 혼합 재료, 70×70×70(cm)
<기억 전달 포자 - 왕다람쥐꼬리 너덜지대> (2025), 혼합 재료, 50×40×40(cm)
<기억 전달 포자 - 왕다람쥐꼬리 숲> (2025), 혼합 재료, 100×50×50(cm)
<기억 전달 포자 - 흩날리는 포자> (2025), 홀로그램, 가변 크기
<기억 전달 포자 - 기억 전달 포자> (2025), 미디어 설치, 가변 크기
Spores That Transmit Memory – Huperzia cryptomeriana in the Forest (2025), Metaverse, variable dimensions
Spores That Transmit Memory – Huperzia cryptomeriana Moss (2025), Mixed media, 70 × 70 × 70 cm
Spores That Transmit Memory – Huperzia cryptomeriana Talus Field (2025), Mixed media, 50 × 40 × 40 cm
Spores That Transmit Memory – Huperzia cryptomeriana Forest (2025), Mixed media, 100 × 50 × 50 cm
Spores That Transmit Memory – Scattered Spores (2025), Hologram, variable dimensions
Spores That Transmit Memory – Spores That Transmit Memory (2025), Media installation, variable dimensions
서문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포자처럼 떠다닌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을 떠돌며,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각의 층위에서 다른 존재의 기억과 어딘가에서 공명한다.
<기억 전달 포자>는 5.18 민주화운동을 겪은 어머니들의 목소리와 위기종 식물 왕다람쥐꼬리에서 출발한다. 고산지대의 그늘지고 습한 영역, 암석 틈에 서식하는 왕다람쥐꼬리는 전국에 100여 개체 미만으로 파악되는 위기종 식물이다. 이들은 드넓은 무등산 어딘가에서 서식 중이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생을 이어가는 포자 번식 식물이다. 포자는 바람에 몸을 싣고 공기 중을 떠돌며, 언제 어디서든 새로운 생명을 틔울 준비를 한다.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생명력과 포자 번식의 무작위성에서 인간의 언어로 전해지지 못하는 기억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국가 폭력의 잔혹함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다. 많은 기록과 증언 속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역사적 주요 장면들에 등장하지 않는 여성들의 기억이었다. 역사적 서술의 주변부에 있는, 그중에서도 가족 구성원이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삶은 어땠으며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냈는지에 대한 이야기. 나는 그 기억의 감각적 잔재를 탐구하고자 했다.
<기억 전달 포자>는 여섯 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구조적 집합체이자 단일 작품이다. 관람객은 왕다람쥐꼬리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포자에 닿는 ‘접촉’을 하며, 기억이 감응으로 전환되는 ‘전이’의 단계를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서사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 속에서 옮겨붙고, 그 전이의 순간에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Fragments of scattered memory drift like invisible spores. They wander across time and space, resonating somewhere with the memories of others at a sensory level that cannot be articulated in language.
Spores That Transmit Memory begins with the voices of mothers who experienced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and with Huperzia cryptomeriana, an endangered plant species. This plant inhabits shaded and humid alpine environments, growing within crevices of rocks, and is estimated to have fewer than one hundred individuals remaining nationwide. It survives in unseen areas of Mudeungsan, continuing its life as a spore-reproducing organism beyond the visible field of human perception. Spores are carried by the wind, drifting through the air, always prepared to generate new life wherever conditions allow. From this invisible vitality and the randomness of spore reproduction, I came to think about movements of memory that cannot be transmitted through human language.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constitutes a critical axis of modern Korean history and reveals, in a concentrated form, the brutality of state violence. Among numerous records and testimonies, what drew my attention were the memories of women who do not appear in the central scenes of historical narratives. Positioned at the margins of historical discourse—particularly women whose family members were victimized—their lives, and how they continued after the event, became the focus of my inquiry. I seek to explore the sensory residues of these memories.
Spores That Transmit Memory is both a structural assemblage composed of six elements and a single work. The viewer encounters the plant, “discovers” it, approaches it, and makes “contact” with its spores, following the process through which memory is transformed into affect—what I define as a phase of transfer. In this process, memory is not explained narratively; rather, it is transmitted through sensory experience. It is only at the moment of this transfer that memory becomes active again.
위기종 식물 왕다람쥐꼬리를 처음 마주하는 공간
메타버스 환경 속에서 왕다람쥐꼬리를 ‘발견’하고, 현실 공간에서 다시 한번 그 존재를 감각한다.
이 공간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며, 왕다람쥐꼬리를 인식하고 기억의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로이자 시작점이다.
The fourth floor is the space where the endangered plant Huperzia cryptomeriana is first encountered. Within the metaverse environment, the viewer “discovers” the plant, and then senses its presence once again in the physical space.
This space blurs the boundary between the virtual and the real, functioning as both a threshold and a point of departure a passage through which the viewer recognizes the plant and moves toward a space of memory.
포자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공간
왕다람쥐꼬리의 포자가 변주하는 움직임은 5.18 민주화운동을 지나온 70대 어머니들의 파편적 기억을 은유한다.
컨트롤러를 누를 때마다 달라지는 어머니들의 목소리, 그 속에서 언급된 실제 장소를 찍은 사진과 영상, 그리고 사운드 스케이프가 포자 이미지들과 뒤섞여 떠오른다.
매번 달라지는 배열 속에서 기억을 고정된 서사가 아닌 변형되는 감각적 구조로 경험하는 이곳은 말해지지 못한 기억이 감각의 층위에서 다시 누군가에게 닿는 공간,
즉, ‘기억이 감응으로 전이되는 순간’을 체험하는 장소다.
The fifth floor is a space that brings the viewer closer to the spores.
The shifting movements of the spores metaphorically evoke the fragmented memories of mothers who lived through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Each time the controller is pressed, different voices of the mothers emerge. Photographs and videos of actual locations mentioned in their testimonies, along with soundscapes, surface interwoven with the spore imagery. Within constantly changing configurations, memory is experienced not as a fixed narrative, but as a mutable sensory structure. This is a space where unspoken memories reach others at the level of sensation a site where one encounters the moment “when memory is transformed into affect.”
평론
포자를 따라가다 만나는 평행 지대
최은총
유미루 작가는 본격적으로 시각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기 이전, 다큐멘터리를 공부하면서 사회의 여러 이면을 관찰하고 기록해 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작가는 묘한 불편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카메라가 지닌 재현의 폭력성이었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는 촬영해야 하고, 촬영을 위해서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재현의 굴레 안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가장 압축적으로 사건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던 순간들, 원하는 화면과 발화를 얻기 위해 카메라 밖에서 던졌던 질문들, 그리고 편집실에서 이어지는 삭제와 수정의 과정들. 이 모든 행위는 작가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지워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남겼다. 그러나 동시에, 사건과 참사를 외면하거나 망각 속에 흘려보낼 수도 없었던 작가에게 ‘재현의 윤리’는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질문으로 남았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다큐멘터리적 편집이 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문제적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단서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985)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승자의 이야기’로 포장된 전쟁과 혁명의 서사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산문이다. 저자는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고통과 자기 불신을 마주한다. 그렇게 전쟁은 비로소 ‘한 가정 안에서도 두 개의 전쟁을 만들어낼 만큼, 승자와 패자·희생자와 생존자·기억과 망각이 뒤엉킨 복합체로 드러난다.
역사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보듯, 폭력 이후의 기록은 언제나 승자의 논리 앞에서 취약하다. 더욱이 10일간의 기록과 그 이후 45년에 걸친 삶 속에서 개인에게 남은 여파는, 명징함을 요구하는 재현의 장 앞에서 또 한 번 미끄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다시 말할 수 있는 입을 돌려주고, 우리에게는 들을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평행 지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후 작가는 예술의 형식 안에서 재현의 윤리와 미학이 서로 맞물려 작동할 수 있는 틈을 모색하며, 그 사이에서 조심스러운 조율을 이어갔다. 그 첫 구상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다가가는 일이었다. 우선 작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기억을 지닌 어머니들과 광주 무등산에 서식하는 위기종 식물 ‘왕다람쥐꼬리’의 생태에서 유사점을 발견하고, 두 존재를 서로 겹쳐 바라보았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발견하고 마주하기 어려움을 닮았다”고 말한다. 해발 1,197m에 이르는 무등산의 깊은 산세, 돌과 바람으로 형성된 너덜지대 사이에 뿌리 내린 왕다람쥐꼬리의 존재가, 민주화운동의 기억을 온몸으로 겪어낸 채 여전히 광주의 땅에 굳건히 자리한 어머니들의 존재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왕다람쥐꼬리는 동아시아 지역의 깊은 숲속, 바위나 산비탈에서만 자라는 희귀식물로 개체 수가 매우 적다. 꽃과 씨앗 없이 포자로만 번식하는 독특한 생태 때문에, 개체를 지켜내는 일은 더욱 어렵다. 2024년 무등산에서 이 식물이 발견되었을 때 언론에 보도될 정도이며, 현재 무등산에서 확인된 왕다람쥐꼬리의 개체 수는 단 8개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처럼 희귀하고 보호가 어려운 존재가 광주에 뿌리내리고 있는 현실에서, 시간이 흐르며 5·18의 기억을 지닌 이들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들과 왕다람쥐꼬리 사이에서 일종의 평행 지대를 발견한다.
작가는 전시의 동선과 구성을 통해, 어머니들과 왕다람쥐꼬리가 서로 공명하는 평행 지대를 공간적으로 구현한다. 가장 먼저 전시장에 들어서면 메타버스 <숲속의 왕다람쥐꼬리>(2025)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 작품은 작가가 무등산의 풍경을 직접 3D 데이터로 전환해 만든 가상 공간으로, 현실에서는 좀처럼 마주하기 어려운 왕다람쥐꼬리를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관람객이 포자를 따라 움직이다 왕다람쥐꼬리를 마주하는 순간, 손끝으로 미세한 진동이 전해진다. 이 약하지만 분명한 떨림은 앞으로 펼쳐질 평행 지대가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첫 접촉의 신호가 된다. 이 여정은 영상 <왕다람쥐꼬리>(2025)로 이어지며, 마치 관람자가 방금 경험한 메타버스에 계속 스며들어 온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안에서 포자의 흐름을 따라 전시장 2층으로 올라가면 전시의 중심이 되는 작품 <기억 전달 포자>(2025)를 만나게 된다.
<기억 전달 포자>는 왕다람쥐꼬리의 노란 포자를 모티프로 한 둥근 컨트롤러를 눌러 5·18을 겪은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구성된 작품이다. 관람자는 손끝의 작은 압력으로 장치를 작동시키며, 그 접촉을 통해 어머니들의 기억에 감각적으로 닿는다. 이 장치는 이야기를 불러내는 매개이자, 기억을 향해 손을 내미는 통로로 작동하게 된다. 작품 속 어머니들의 목소리에는 건조한 역사 서술 속에서는 결코 기록되지 못한 개인적이고 불합리한 기억이 스며 있다. 그것은 우리가 듣지 못했거나, 혹은 듣기를 주저해 온 서사들이며, 역사의 거대한 문장 사이에 눌려 있던 목소리들이다. 이 목소리들은 5·18의 생존자로서, 피해의 당사자이면서도 영웅으로 호명되지 못한 이들의 담담한 시간과 마주하게 한다. 그 담담함 속에는 오직 살아내야 했던 이들의 삶의 무게가 깃들어 있다.
작가는 이러한 목소리와 마주하며 작품을 위한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어떠한 유도 질문이나 수정, 편집도 하지 않을 것. 둘째, 인물을 특정할 수 있는 시각적 정보는 배제할 것. 셋째, 최종 작품이 선형적인 서사의 구조를 따르지 않을 것. 이 원칙에 따라 작가는 어머니들의 발화를 발췌하거나 재구성하지 않고, 인터뷰 전체를 여러 조각으로 분해해, 소서가 감상자에 따라 지속해서 바뀌도록 설계했다. 이는 작가가 그들의 말을 온전히 간직하는 동시에, 그것이 하나의 고정된 이야기로 완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또한 작가는 질문을 배제함으로써,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대신, 민주화운동 이후 오랫동안 침묵 속에 머물렀던 어머니들의 말이 스스로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화면에는 그들의 얼굴 대신, 목소리 속에 언급된 장소들의 현재 풍경과 그곳의 소리가 교차해 등장한다. 그렇게 어머니들의 목소리, 공간의 이미지, 그리고 왕다람쥐꼬리 포자가 흩날리는 영상이 겹겹이 이어지며, 1980년 이후 45년의 시간을 조용히 느끼게 한다.
이처럼 <기억 전달 포자>는 공동체의 집단 기억 속에 분명 존재하지만, 마치 포자처럼 눈에 띄지 못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어머니들의 기억과 접촉하며 생성되는 일시적인 평행 지대에서, 그간 말을 빼앗겼던 이들은 말할 수 있게 되고, 거대 서사 속에서 제대로 들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우리는 비로소 귀 기울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일시적이지만 강력한 접촉 경험은 서서히 사라지는 형식 안에서 작가가 만들어낸 평행 지대는 비로소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말한, “암흑의 구멍 안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응시하고자 하는, 그것에 빛을 비추려, 그것을 어둠에서 끄집어내려 시도하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